쌀시장 관세화 서둘러선 안 돼...우리도 '현상 유지'로 가야
1. 들어가며
작년 3월 한미FTA가 발효된데 이어 5월부터 중국과의 FTA 협상이 시작되어 현재 양국간 협상이 진행 중에 있다.
게다가 최근 박근혜정부는 한·중·일 3국간 FTA 협상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혀 동시다발적 FTA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런데 이러한 동시다발적 FTA 못지 않게 중요한 또 하나의 통상문제가 박근혜정부 임기 내에 현안으로 닥쳐오고 있다.
현행 쌀관세화 유예기간이 2014년으로 끝나기 때문에 2015년부터 쌀시장 개방여부를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방론자들은 이미 지난 2010년부터 쌀시장 조기 관세화를 주장한바 있기 때문에 2015년부터는 쌀시장도 관세화로 전환하여 누구나 관세만 내면 외국 쌀을 마음대로 수입할 수 있도록 완전 개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으로 예상된다.
아마 정부 관료, 주류 언론, 신자유주의 학자들 대부분이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상태로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쌀시장은 2015년부터 관세화로 완전 개방되는 운명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여 진다.
쌀시장의 관세화 전환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쌀시장의 관세화 완전개방은 분명히 피할 수 있다.
쌀시장의 관세화 여부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책적 선택에 달린 문제이다. 이 글은 2015년 이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대안인가를 말하고자 한다.
2. 2014년에 쌀관세화 유예 10년이 종료된다
지금 한국의 쌀시장은 부분 개방되어 있는 상태이다. 매년 최소시장접근(MMA)물량만 의무적으로 수입하고, 나머지는 수입을 금지하고 있는 방식이다.
당초 1995년부터 발효된 우르과이라운드(UR) 농산물협정에 따라 한국은 ‘쌀’만은 관세화로 개방하지 않고, 10년 동안 관세화를 유예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물론 관세화 유예의 댓가로 매년 MMA 물량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했다. 이에따라 1995년 국내 소비량의 1%에 해당하는 약 5만톤을 의무수입 했다.
의무수입물량은 정해진 비율에 따라 매년 증가했는데, 10년차인 2004년에는 국내 소비량의 4%에 해당하는 약 20만톤을 수입해야 했다.
그런데 당초 10년의 관세화 유예 기간이 2004년으로 종료되었고, 재협상을 벌인 결과 2005년부터 2014년까지 다시 10년간 관세화를 유예하는 대신에 의무수입 물량을 더 늘려야 했다.
2005년 의무수입 물량은 약 22만톤 수준이었고, 2014년에는 약 40만톤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제 2014년이 내년으로 다가 왔다. 지난 2004년에 있었던 쌀재협상 결과는 2014년까지 관세화를 유예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2015년부터는 어떻게 되는가?
3. 2015년 이후 선택 가능한 시나리오
2015년부터 쌀시장도 관세화로 완전 개방해야 하는가? 아니면 현행처럼 의무수입 물량만 수입하고 관세화로 전환하지 않을 수 있는가?
만약 관세화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의무수입 물량은 더 늘어나야 하는 것인가?
2015년 이후 한국이 쌀시장 개방 여부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를 예상할 수 있다.
(1) 40만톤 의무수입 물량 + 관세화 전환
(2) 의무수입 물량 증가 + 관세화 유예
(3) 40만톤 의무수입 물량 + 관세화 유예
(1)은 2015년부터 한국이 스스로 쌀시장을 관세화로 전환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 경우 2014년 의무수입 물량 40만톤은 2015년 이후에도 매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누구나 관세만 부담하면 마음대로 쌀을 수입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이때 수입쌀에 대한 관세 수준을 결정해야 하는데, 다소 이견은 있지만 대체로 약 400% 수준에서 관세를 부과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는 관세화 유예 기간을 추가로 연장하는 대신에 의무수입 물량을 더 늘리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 경우에는 유예기간 및 의무수입 물량 수준을 지난 2004년과 같이 다시 협상을 통해 결정할 것이다.
미리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정부 관료들의 과거 발언에 따르면 10년의 유예기간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국내 소비량 기준으로 최소 4%에서 최대 8%까지 의무수입 물량을 늘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의무수입 물량이 최소 약 60만톤에서 최대 약 80만톤까지 늘어나게 된다.
(3)은 현행처럼 관세화 유예를 계속 유지하면서, 동시에 의무수입 물량도 더 늘리지 않고 약 40만톤 수준에서 고정시키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 경우는 UR 농산물협정의 후속 협상인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추가적인 개방조치를 더 이상 확대하지 않고,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즉 DDA 타결 이전까지는 스스로 관세화로 전환하는 조치도 취하지 않고, 새로운 추가조치를 확대하기 위한 재협상도 벌이지 않고, 현상유지(standing still)를 선택하자는 것이다.
4. 2015년이후 어떤 선택을 할 건가? 한미FTA후폭풍도 고려해야
2015년 이후에 쌀시장의 개방 여부에 대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시나리오 가운데 최선의 경우는 앞에서 언급한 것 가운데 (3)에 해당하는 것이다. 국내 쌀농업에 미치는 피해가 가장 적기 때문이다.
(1)의 경우는 약 40만톤의 의무수입 물량을 앞으로도 계속 유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관세화로 쌀시장을 개방하는 부담도 안게 된다. 관세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국제 쌀값이 크게 오른 상황에서 약 400% 내외의 높은 관세를 부과하기 때문에 관세화로 전환해도 쌀수입이 크게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제 쌀값의 변동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특히 덤핑수출의 가능성도 고려한다면 고율의 관세가 중장기적으로 쌀수입을 막는 실효성 있는 장치가 될 것이라 확신할 수는 없다.
특히 가장 심각한 것은 관세화로 전환할 경우 한미FTA 혹은 한중FTA와 연계되어 관세장벽 자체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한겨레신문(2011년 9월 15일)이 미국 외교전문 고발사이트인 위키리크스를 인용한 보도에 의하면 당시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한미FTA 공식 서명직후인 지난 2007년 8월 29일 미국의 얼 포머로이 하원의원(민주당)과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와 만난 자리에서 “현재로는 쌀문제를 다룰 수 없지만 2014년 세계무역기구(WTO)의 쌀관세화 유예기간이 끝나면 한국 정부가 미국과 다시 협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쌀시장을 관세화로 전환한 상태에서 미국이 한미FTA를 활용하여 미국산 쌀에 대해서는 관세를 낮춰 줄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중국 역시 한중FTA를 이용하여 중국산 쌀에 대해서도 미국산 쌀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할 수 있다.
현재 의무수입 쌀 가운데 약 70% 이상이 중국산 및 미국산인 것을 고려할 때 두 나라에 대한 쌀의 관세를 낮추는 것은 사실상 쌀의 관세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으며, 국내 쌀농업은 급속하게 붕괴되는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2)의 경우는 지난 2004년과 마찬가지로 재협상을 벌여서 관세화 유예를 추가로 더 연장하는 대신 의무수입 물량을 늘리는 방식이다. 1995~2004년의 1차 관세화 유예기간에 국내 소비량의 4% 수준까지 의무수입 물량을 늘렸다.
2005-2014년의 2차 관세화 유예기간에는 국내 소비량의 약 8% 수준까지 의무수입 물량을 늘려 왔다.
만약 2015년 이후 추가로 10년 정도를 관세화 유예할 경우에는 국내 소비량의 약 12% 내지 16% 까지 의무수입 물량을 늘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정부 일각의 예상이다.
지금까지 앞에서 말한 ‘국내 소비량 기준’은 UR협상이 진행되던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의 소비량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지난 20여년간 쌀 소비량이 감소한 결과 현재의 쌀 소비량과 비교할 경우 의무수입 물량이 실제 국내 소비량의 약 20% 이상이 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도 국내 쌀농업에 미치는 피해는 매우 크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국내 쌀농업이 붕괴되는 상황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5. 현상유지는 가능한 대안인가
(1)과 (2)를 선택하는 것은 어느 경우에도 국내 쌀농업의 붕괴를 막기 어렵다는 점에서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시나리오는 (3)의 경우이다.
UR 농산물협정의 후속 협상인 WTO/DDA 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관세화로 전환하지도 않고의무수입 물량도 더 늘리지 않고 2014년의 약 40만톤 수준에서 고정시키자는 것이다.
이른바 다른 WTO 회원국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추가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현상 유지를 선택하자는 것이다.
쌀 관세화 문제는 UR 농산물협정에 근거하고 있다. UR 농산물협정은 1993년 12월에 타결되어 각 국의 비준을 거쳐 1995년 1월 1일부터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에 따라 선진국은 1995-2000년까지 6년간 약속한 의무를 이행했고, 개발도상국은 1995-2004년까지 10년간 약속한 의무를 이행했다. 한국은 농업분야에서 개발도상국 지위를 인정받아 10년간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그런데 WTO 회원국들은 각각 2000년과 2004년 이후에는 추가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지금까지 현상 유지를 하고 있다.
선진국은 2000년 12월 31일 수준의 개방상태를, 개발도상국은 2004년 12월 31일 수준의 개방상태를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후속 협정문을 만드는 WTO/DDA 협상이 아직도 타결되지 않고 장기 표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DDA 협상은 여전히 조기 타결 보다는 장기 표류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이미 2004년 쌀재협상을 통해 2014년까지 추가로 의무를 한 번 더 이행하는 잘못을 범했다.
당시에도 현상 유지에 대한 목소리가 높았지만 정부와 통상관료 그리고 기득권 동맹들은 DDA 협상이 곧 타결될 것이라는 엉터리 전망을 제시하면서 서둘러 쌀재협상을 마무리하면서 10년간의 추가적인 의무를 덜컥 합의해 준 것이다.
이 때문에 쌀의 의무수입 물량이 2014년까지 40만톤 수준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당시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협상은 국제 사회에 한국을 ‘글로벌 호구’로 낙인찍는 계기로 작용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퍼주기 협상’이 국제적 조롱거리로 전락한 것이다.
2014년으로 끝나는 쌀관세화 유예 이후에도 여전히 DDA 협상이 타결되지 않는다면 한국도 당연히 다른 WTO 회원국과 마찬가지로 현상유지(standing still)를 선택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
쌀의 의무수입 물량은 2014년의 40만톤 수준에서 고정시키고, 관세화로 전환하지도 않고, DDA 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현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다.
6. 결론에 대신하여
정부와 통상관료 그리고 개방론자들은 관세화로 전환할지 아니면 재협상을 통해 의무수입 물량을 추가로 더 늘려야 할지 여부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UR 농산물협정문의 문구를 해석하는데 매달리고 있다. 2015년 이후 한국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협정문의 문구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협정문의 적용과 의무이행은 WTO 회원국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다른 모든 회원국들이 이미 2000년과 2004년 상태에서 현상유지를 해오고 있는데, 한국만 지난 10년의 추가적인 의무이행에 이어 또 다시 한 번 더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본다.
현재 정부는 현상유지에 대해서는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그래서 이 상태로 가만히 둔다면 2004년 쌀재협상에서 범했던 과오를 또 다시 답습할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은 매우 시급하고, 매우 중요한 일이다. 2015년 이후에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UR 농산물협정문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결정에 달려 있다.
장경호 건국대 겸임교수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부소장)
출처 : 농업농민정책연구소‘녀름’ 제124호 이슈보고서 2013.3.25.
http://nongyeon.org/bbs/board.php?bo_table=s2_2&wr_id=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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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최종편집일:2024-03-15 11:10:01
